Fan of Object Interview #8
2023년 Fan of Object의 첫 번째 주자인 안희주님의 취향을 소개합니다. 철학과와 연기예술학과를 복수 전공하시는 희주님은 깜짝 놀랄만한 스토리를 공유해주시는데요. 아날로그와 디지털, 철학서, 행운의 아이템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희주님의 취향을 함께 나눠보아요.
Q. 자기소개를 간단히 부탁해요.
안녕하세요. 성균관대학교 철학과, 연기예술학과에 재학 중인 24살 안희주입니다. 철학 원서는 대학생이 되어도 재미가 없고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매력적인 책을 좋아합니다. 싼 티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고 별나고 느린 속도를 즐기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커피를 좋아하며 특히 빈속에 커피를 들이부어 위가 부르르 떨며 욕을 건네오는 걸 즐기는 다소 변태적인 사람입니다.
Q. 에 소개해 주고 싶은 물건이 무엇인가요?
나의 투박한 노트와 우그러진 철제 필통.
겉보기에 수려하거나 독특한 구석 없는 나의 노트는 빛에 따라 붉어지기도 푸르러지기도 하며 보통은 햇살을 머금은 흰 벽이 내는 따뜻한 색쯤을 띄고 있습니다. 글이 더해질 때 두꺼운 철조망같이 언어를 가둘 정렬된 선이 없고 다만 옅게 모눈 격자를 그어 자유롭게 모눈 사이를 유영하며 언어를 구체화하도록 돕습니다. 필통은 친구에게 그가 런던으로 떠나기 전에 받은 선물입니다. 그는 내게 그 속에 담긴 다양한 흑의 정도를 가진 연필들을 선물하기 위해 이 철제 통을 빌렸겠지만 나는 빌림 당한 이 철제 통의 가방 속에서 날렵하게 존재하는 크기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좋아서 그것에 애정을 더하길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필통은 제가 작년 초겨울 즘 오토바이를 타고 남산 1호 터널을 달리던 중 어떤 택시와 아슬하게 피해 전봇대에 곧장 날아가 박혀 곤두박질치고 정신을 잃었을 때, 가방 속 어딘가에 존재하며 내 몸의 일부를 우그러트리는 대신에 제 몸을 파괴함을 택한 바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발치에 핀 꽃처럼 손쉽게 생명이 소멸하는 전쟁터에서 나를 지켜준 군번줄 같은 것이라 감사함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필통 속에는 애플 펜슬, 채도가 낮은 파란 젤 팬과 채도가 높고 맑은 파란 마카, 19살 적에 철학을 알려준 친구가 선물한 보라색 샤프와 집에서 뒹굴던 작은 지우개가 들어있습니다. 그들은 나의 필요에 꼭 맞게 계산된, 덜어낼 수도 더할 수도 없는 완벽한 조화의 상태로 존재하기에 내 필통을 열어보길 좋아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그대로네" 하고 내 필통의 정체성에 대해 일축한 바 있습니다.
요즈음의 나는 예술을 습득하고 표출하는 인생의 목표의 점도와 방향성이 모호해져 그로부터 스멀스멀 끓어오르는 불안과 좌절 같은 감정들을 주로 노트에 녹입니다. 불과 두 달 전쯤에 나는 사무치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그이에 대한 찬사와 애정 어린 순수한 고백과 소유와 환희와 절망에 대해 기록했던 적도 있습니다. 노트에는 나에게 불어오는 자극과 살갗에 들러붙은 먼지와 부식돼 떨어져 버리고야 마는 머리카락과 각질 같은 빛바랜 추억들이 그 당시의 찬란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숨 쉽니다. 그렇기에 노트를 누군가에게 펼쳐 보일 수도 쉽게 잊고 버리거나 버스정류장에 남겨두고 올 수도 없습니다. 노트 속 표상들은 내 뇌에 대한 해부학이며 가슴이 뛰는 속도를 기록한 악보이며 손끝에서 나오는 힘을 통해 조물된 조각상입니다. 또한 그들은 나의 표방이며 나의 추악함과 애증이며 그렇기에 언제든 곁에서 날 호흡하도록 하며 어디서든 내가 무언가 게워내려 토를 하고자 할 때 등을 두드려주는 부모 같은 존재입니다. 기록이 끝나 더 이상 설자리가 없어진 노트는 내 방 조그만 옷장 속 아이스 백 속에 보관되며 그들은 닫혀있어도 내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도록 숨을 쉬며 실존합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느끼고 매일 아침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며 나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Q. 의미가 깊은 철제 필통과 노트를 포브젝트에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필기구라는 정의가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인류는 동굴의 벽이나 돌멩이에 끊임없이 기록이라는 행위를 계속해 왔잖아요. 순간의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점에서 노트와 필기구는 인간과 가장 뗄 수 없는 사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주로 무엇을 기록하고, 또 남겨두고 싶나요?
그게 바로 핵심인 듯합니다. 도구가 존재하기 전에도 사람들은 무의식 간에 기억하고 싶은 것들, 시간이 지나 흐릿해지면 아쉬울 것들에 대해 기록하기를 원했다는 사실이요. 저도 그렇지요. 나라는 사람이 감각하는 새롭고, 뭉클하고, 긴박하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사랑스러운 모든 것들 중 시간이 흘러 흐릿해지면 아쉬울 것 같단 생각이 들면 곧장 펜을 듭니다.
예시로 최근에 읽은 , 임지연(2017)에서 사랑에 대해 정의한 구간이 인상 깊어 적어놓았던 걸 공유할까 합니다.
- 이중성의 역설 구조로 작동하는 사랑
안정감-불안정성
구속-자유희생-자기보존
만남-이별
쾌락의 순간성-지속적 연대감
유토피아-디스토피아
부드러움-폭력
더 사랑하는 자-덜 사랑하는 자의 비대칭성
사랑의 맹세-미래의 불확실성
사랑의 의지-감정의 변화
Q. 아날로그적인 기록 방식은 아무래도 클릭 한 번, 스와이프 한 번으로 지워질 수 있는 데이터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오래된 기록을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다시 들춰본 적이 있나요? 예전의 기록을 들여다보았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시나리오에 영감을 줄 만한 글감이 있을까 싶어 작년 6월부터 모아둔 5개의 노트를 전부 꺼내들고 카페에 가 커피를 한 잔 시키고 심호흡을 한 후 첫 번째 노트를 펼쳐 들었습니다. 나의 글씨와 그림, 과거 어느 순간을 함께 했던 이들의 글과 그림이 망막에 맺히는 순간. 과거의 내가 노트를 펼쳐들었던 공간과 날씨, 머리 길이와 옷 취향, 교류했던 사람들, 관심 가지던 노래와 주제들. 모든 것들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감정이 일순간 휘몰아쳤고 거진 공황이 올 뻔한 경험이 있더랬죠. 그게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거대한 차이점인 것 같습니다. 과거의 순간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각인된다는 점이요.
Q. 필통 속 아날로그 필기구들과 함께 있는 애플 펜슬이 눈에 띕니다. 아이패드와 같은 전자기기에 메모를 하는 것과 종이 노트를 사용하는 것 중 어떤 걸 더 선호하시나요? 디지털과 아날로그 중 희주님은 어떤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
판단컨대 글자를 끄적이며 녹여내는 편이 더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면 노트를 펼치고, 혹은 편지를 보내기 전 초고를 쓴다거나, 감정이 세밀한 글을 쓸 때도 그러합니다. 공부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수정사항이 빈번한 것들은 아이패드로 작업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노트가 더 취향이긴 합니다만 아이패드의 편리성을 아주 포기할 순 없달까요.
Q. 들으면서 깜짝 놀랄 만큼 큰 사고를 당하셨는데, 지금은 완전히 회복하시고 건강하신 것이길 바라요. 정말 친구분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 희주님을 지켜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안전을 기원하며, 혹은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며 ‘나만의 행운의 아이템’을 소지하고 다니기도 하는데요. 소개해 주신 필통도 희주님에겐 그런 존재가 되었을 것 같아요! 또 다른 ‘나만의 행운의 아이템’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걱정 감사드려요. 친구가 선물한 행운 덕인지 지금은 사고 후유증 없이 아주 건강하답니다. 자주 들춰보거나 소지하지는 않지만 소중히 여기는 이들의 작은 낙서나 편지들을 한편에 모아두곤 하는데요, 시간이 흘러 기억이 가물 해질 때쯤 그것을 모아둔 상자를 열어 하나씩 펼쳐보면 기분이 무척 좋아진답니다. 흰머리 수북한 할머니가 됐을 때에도 간직할 것, 그것들로부터 얻는 좋은 기운이 끝없이 보장된 것, 그들의 작은 체취가 또 다른 저만의 행운의 아이템입니다.